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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1.노국에서의 관직、total 1 picture

노국에서의 관직

노나라의 국왕 노소공이 망명하여 떠난후, 노국에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는 타향에서 객사하고 돌아오지 못한다. 노소공이 돌아 가시자, 국왕자리에 노정공이 오르게 되는데, 그해 공자나이는43세가 된다. 공자나이 50세 전후가 될때 노나라의 정국은 이런 저런 사건들로 많은 풍파들이 생겨난다. 연이은 사건속에서 공자는 관직을 맡게 되며, 4년동안 나라일을 하게 된다.

그당시 노나라 정치는 막강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어 대가족을 이루고 있는 3명의 사대부, 계손씨(季孫氏), 숙손씨(叔孫氏), 맹손씨(孟孫氏)들의 손에 쥐어 있었다. 그 밑에서 일하는 가신들도 사대부들이 하는 대로 따라했고,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인 세력도 날로 강해져만 갔다. 그중에도 계손씨의 가신으로 있는 ‘양호’라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제일 행패가 심했다. 그는 기타 여러 불만있는 가신들을 설득하여 연합해서 사대부 어르신들을 없애고, 그들이 직위를 착취하자고 했다. 그러나, 사건은 폭로가 나게 되고, 제국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 이듬해, 양호사건으로 인한 풍파도 조용해지면서, 노나라의 국왕인 노정공은 정식으로 공자에게 중도읍이란 높은 장관직을 준다. 국왕의 명으로 크나 큰 관직에 오르게 된 공자는 그때 나이 51세다.

공자의 직위는 국왕인 노정공이 임명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직위는 3대 사대부보다 조금 낮지만, 사대부의 직속 신하가 아니었으므로, 비교적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공자가 관직에 머무는 동안, 훌륭하게 해낸 일이 3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상협곡(相夾谷), 합제묘(合諸墓), 타삼도(墮三都)사건속에서 업적을 이룬다.

상협곡(相夾谷)사건, 이는 공자가 관직을 맡은 이듬해에 생겨난 일이다. 기원전 500년 여름, 노나라 정공이 협곡(夾谷)이라는 곳에서 제나라의 제경공과 만나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자리에 공자는 노정공의 보좌로 수행하게 된다. 제나라 사람들은 공자가 예(禮)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용감하지 않고 무력으로도 약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회담 중에 노정공을 납치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위기에 부딛힌 공자는 즉시 호령을 내려, 모든 인원이 비상사태에 취하도록 명하였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중원(中原)의 국왕들이 만나서 회담하는 자리에, 폭력을 휘두르고 무질서한 행실로 천리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빚게 되면, 제나라 국민들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에 제경공은 포기하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에 서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제국은 자신이 다른 나라를 칠때 노국이 전쟁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항을 제멋대로 집어 넣었다. 공자는 이에 대하여, 그러면 제국이 노국에서 쟁탈한 토지를 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여, 빼앗긴 곳을 돌려 받았다.

합제묘(合諸墓)사건도 역시 기원전500년의 일이다. 이때 공자는 사구(司寇)라는 오늘의 법무부 장관과 같은 직무로 승급했다. 원래 계평자(季平子)의 권모술수 아래 노소공의 묘지를 노국의 선왕들이 묻힌 묘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묻었다. 그러하자 공자는 사람을 시켜 노소공 묘지의 범위를 크게 확대시켜, 선왕의 묘지와 이어지게 만들어, 노국의 선왕들 묘지와 함께하게 하여 선왕들의 묘지와 같이 존경받게 했다.

타삼도(墮三都)사건은 기원전 498년의 일이다. 공자는 3대 사대부들이 갖고 있는 성읍과 군사력을 감축시켜 정치적 질서를 회복하고저 앞정서서 펼쳐 나갔다. 마침 그 당시 3대 사대부가의 신하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계손씨와 숙손씨가 모두 순수히 받아들여,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숙손씨의 후(郈)라는 성읍을 순조롭게 거둬들일 수 있었다;그 다음으로는 계손씨의 폐(費)라는 성읍을 거두어 들이려고 하는 데, 성읍의 책임자인 공산(公山)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데리고 도성까지 공격해왔다. 이에 공자가 노나라 병력을 인솔하고 대항하여 그들을 물리쳐 폐라는 성읍도 거두어 들일수가 있었다. 그후로, 맹손씨의 성(成)이라는 성읍을 거두어 들이려고 하는데, 맹손가의 우두머리 신하인 염처부(歛處父)가 맹의자(孟懿子)에게 말하길: “이 성읍은 노나라가 북쪽으로 제국을 향할때, 중요한 거점이기 때문에, 이 성읍을 보유하고 있어야 맹씨가문에 유력한 보장(孟氏之保障)으로 남는다고 설득하였다. 결국 그해말에 노정공이 병력을 데리고 직접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3대 사대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노정공이 돌아가시자 노애공이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노나라의 임금이나 신하들은 정치적인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특히, 원래 공자를 믿고 공자의 제자에게 관직까지 주던 계환자(季桓子)는 공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면서 비방하기 시작했다. 정세가 변화되자, 공자는 자신이 더이상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것을 실감하고 노국을 떠나게 된다.

Review by 梁台根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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