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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pei Confucius Temple Confuci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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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1.행단강학、total 1 picture

행단강학

노국의 국정은 사실상 계손씨(季孫氏)가 장악하고 있었다. 노나라의 국왕인 소공(昭公)은 그런 정치 상황에 매우 언짢아 했다. 또한 계손씨는 날로 교만해지고 사치와 분에 넘는 행실로 신하들과도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소공 자신도 덕있는 군자가 아닌것으로, 나라 안밖의 견식있는 자들은 그가 오래 못갈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이런 불안한 정황속에서 기원전 517년이 되자 마침내 일이 터지었다. 소공이 계평자와 사이가 않좋은 신하의 말을 듣고, 병력을 일으켜 계손씨와 맞서 싸운것이다. 소공의 정치 실력을 감안하자면, 계평자를 나라에서 내쫒기만 할 수 있어도, 서서히 민심을 회복하며 나라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었는데, 끝까지 그를 없애려 들자, 맹손‧숙손씨들이 구원병으로 가담하게 되어, 그는 결국 부하들과 함께 제국(齊國)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망명을 한 경우, 귀국을 하려면 두가지 방도가 있는데, 하나는 국내에서 역신을 성토한 후, 국왕을 영접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큰나라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힘으로 국왕을 모셔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충신들은 소공이 도읍에 돌아와 정국이 안정되도록 제나라와 노나라사이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그 가운데 공자도 그 때문에 제국에 나가게 되었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35세로, 제나라에서 이런 저런 문물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조정과 접촉 하였다. 제경공(齊景公)은 공자와 여러번의 만남을 가지며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제나라 또한 국왕으로서 정치에 실책이 있었고, 사대부들의 독단문제등이 존재하였다. 제경공은 또 애첩이 많아 후계자 문제에도 적당한 후계자 선정이 되지 않아, 나라안밖으로 불안한 상태인것으로 공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나라의 국왕은 국왕으로서의 일을 행해야 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직분을 지켜야 하며, 집안의 가장은 가장답게 의무를 다해야 하고, 자식은 자식으로서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공자의 이말은 당시 제나라 국왕이 정치를 돌보지 않고, 신하가 국왕을 따르지 않고, 어버이가 어버이 노릇을 하지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지 않는 상황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었다. 제경공은 이말을 듣고 매우 탄복하며, 공자를 임용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까운 심복 옌잉(晏嬰)이 먼저 반대하며, 공자가 추구하는 것은 ‘예약의 도(禮樂之道)’인 것으로, 오래되어 때가 지나고 번거로운것들 이라며 임용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경공은 태도를 바꾸어 공자에게:“노나라 국왕이 계씨에게 대하듯이 공구(孔丘)를 대접하라면 나는 그 많큼은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의 중간정도 까지는 대접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자 이 또한 제나라 사대부들이 무리져서 반대를 하여, 자신의 권력에 한계성을 느낀 경공은 어쩔 수 없이 공자에게 이렇게 말한다:“나도 이제는 늙었구나, 당신을 임용 할 수도 없구려.” 제나라 자체가 이미 어지러운 상태이어서, 노나라 정무에 기력을 쓸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소공의 행실 또한 주위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있지 않아, 공자는 다시 노나라에 돌아와서 잠적하고 나오지 않았다.

공자 스스로 말한 바 같이“나는 나이 서른에 올바른 신념이 섰다.” 30여세가 된 공자는 학식과 수양이 더욱 깊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자, 찾아와 배우려는 학생들이 뫃이기 시작하여 학생수도 많아져, 평생 강학으로 생애를 보내는 공자의 일생이 펼쳐지게 된다.

시‧서‧예‧악 (詩、書、禮、樂)은 원래 주나라 시대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갖추었던‘기본능력’이었던바, 더욱이 예와 악은 정치제도를 비롯하여 사회에서의 인륜관계에도 깊이 연계가 되는 매체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귀족의 자제들은 이런 지식들을 점점 소홀히해 낮선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 아래, 예를 잘안다고 알려진 공자는 여러곳으로 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535년 공자가 17살가 되었을 때, 노국의 국왕 소공이 초나라 행사에 참석하러 출행을 하게 되는데, 정나라를 지나게 되자, 정나라에서 예에 따라 노소공 일행을 대접하고 위로하였다. 그리고는 초나라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도 예를 베풀어 영접하였다;그당시 소공을 수행하던 상경 맹희자는 그 상황에 맞추어 예로 대응했어야 하는데, 예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 지 모른 것이다. 노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예임으로, 노나라의 고위 관리로서 주예(周禮)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맹희자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후 예를 배우는 일을 중요시하게 되고, 예를 잘 아는 사람을 초청하게 되었다. 기원전 517년 맹희자는 임종하기 전에 이런말을 남기었다:”예라는 것은 사람이 입신처세하는 근본이다. 공구(孔丘)라는 사람이 앞으로 잘된다고 들었는 데 그의 조상이 모두 덕행있는 사람들로, 그덕이 후손에게 전해져 그가 덕을 볼것이다. 내가 만약 살만큼 살다가면, 아들 둘이 반드시 그를 선생으로 받들게 하여 그로부터 예를 배워야 앞으로 노나라에서 지위를 온건히 지킬 수 있다.” 하였다.

공자의 뛰어난 학식과 수양은 상경들에게 까지도 전해져, 그당시 선비들의 자제들이 공자를 찾아와 배우려 했다. 그들이 공자를 찾아와 배우려 하는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어떤이는 시국이 혼란하고, 정신적 가치가 모호해지고 있는 시대에 시서예악등의 학문이 주대(周代)의 전통적인 질서와 가치관이 담겨 져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어떤이들은 경전과 문헌에 대한 배움의 열정으로, 시서예악의 학문은 예로부터 선비의 자제들은 가까히 하기가 어렵고 배우기도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도 학습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에 더욱 큰 발전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당시 선비들은 대부분이 무관으로 관련 업무를 맡았고, 일부 문관은 공자가 젊었을 때 종사하던 창고관리나 소나 양을 지키는 축목처럼 일반 사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엽이 지나 말엽에 접어들면서, 사대부들의 세력이 커지자, 위로는 왕실까지 침범하여 나라의 국정도 장악하고 있어서, 직계가 높은 공직자의 수요가 덩달아 늘어났다. 거기다 귀족의 자제들이 혈통만으로도 작위를 계승할 수 있어서, 자신들의 재능이나 학문에 노력하지 않고, 그들 밑 단계에 있는 선비 자제들로부터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행정업무를 돕도록 한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원래는 상층 귀족들의 자제에게만 전수하고 학습하던 시서예악의 학문을 선비 자제들에게도 전수하게 되어 그들이 출세하게 되는 지름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일반 귀족출신의 제자가 가장 많았고, 이러한 목적등으로 찾아온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매우 좋아 하시어, 언젠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지식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배워도 만족해 하지 않으며;남을 가르침에 있어,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일상다반사와 같으니라”[《출처: 논어》]그래서 공자는 학생들 출신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공부하려는 동기가 어떠하든 간에 모든 학생들을 환영하는 태도로 맞이했다. 배우려 하는 사람이 스승에 대한 예를 어느정도 만 보여주면,공자는 그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후세사람들이 찬양하고 있는 몇가지 점들을 들어 보면, 하나가 “유교무류 (有教無類)라 하여, 학생의 생활배경이나 그들의 성격 혹은 학습진도가 어떠하든 간에 공자께서는 모두 정성을 다해 지도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께서 “인재시교(因材施教)”를 실시하여, 학생들의 학습상황에 따라 토론해야할 내용의 깊이를 정하고, 학생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방식에 맞추어 설명하거나 충고를 해주었다. 또한 공자의 가르침은 학당안이나 문자속에 국한되지 않았고 스스로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평상시의 생활을 기록한 내용들이 많았는데, 공자께서도 학생들에게:”내가 너희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 하느냐? 너희를 속인건 아무것도 없단다. 나의 모든 행동거지를 너희들은 매일 보고 있지 않는가.”하였다. 공자의 정성어린 가르침 아래서 물론 많은 사람이 행단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기도 했지만 그중 한무리의 학생들은 공자님으로부터 깨우침을 받고 공자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도를 행하며 진리를 찾는 원대한 이상을 추구하였다.

Review by 梁台根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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