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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pei Confucius Temple Confuci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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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는 다시 시작된다

민국 14년(1925년) 1월, 타이페이 지역 인사였던 황짠쥔(黃贊鈞), 천페이껀(陳培根) , 꾸시엔롱(辜顯榮)씨 등이 다시 관직자와 기업가 200여 명을 모아, 공자묘 건설 규모와 모금 방법을 상의하기에 이른다. 2월 바로 ‘타이페이성묘건설준비위원회(臺北聖廟建設籌備處)’를 만들어 모금과 건설 사업을 맡게 되며, 드디어 10여 년간 사라졌던 타이페이 공자묘는 다시 건설이 시작된다. 3월, 따롱통 지역 인사인 천페이껀씨가 2천여 평을, 또 꾸시엔롱씨가 토지를 사들여 천여 평을, 또 모금액으로 천여 평을 매입하면서 약 5천 평의 공자묘 대지를 확보하였다.

그 당시 타이완은 공자묘 건설의 경험이 전무하여, 탕샨(唐山) 건축가를 초빙해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전 민국 9년(1920년)에, 취앤쩌우(泉州) 유명 건축가 왕이슌(王益順)씨는 타이페이에 초청을 받아 와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멍지아(艋舺)의 롱샨쓰(龍山寺) 및 신주(新竹)의 성황묘(城隍廟)를 건조하였었다. 그래서 타이페이 공자묘의 총감독으로써 다시 그를 초빙해 설계와 건조를 일임시켰다.

왕이슌씨는 취앤쩌우 후이안(惠安)현의 시디(溪底) 사람으로, 청말 푸지앤(福建)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시아먼(廈門)의 남보타사(南普陀寺)도 그가 건조하였다. 그는 많은 중국 남방 건축의 정수를 타이페이 공자묘에 응용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타이페이 공자묘는 매우 전형적인 민남식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페이 공자묘 공사를 시작하면서, 효렴(孝廉, 나라에서 효자로 인정한 사람, 급제자를 일컫기도 한다)인 쩡보위(鄭伯嶼)씨를 초청 풍수를 시찰하여 남북의 방위를 정해, 민국 16년(1927년) 공사를 시작하여, 17년(1928년) 4월 대성전의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의문 (儀門)의 공사도 시작되었다. 민국 18년(1929년)에 대성전이 완성되었으며, 19년(1930년)에는 숭성사(崇聖祠), 의문, 동무(東廡), 서무(西廡) 등이 완공되었고, 새로 조각된 성현의 위패도 완성되었다. 그래서 민국 19년(1930년) 8월27일 공자 탄강일에 30여 년동안 중단되었던 석전제가 다시 봉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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