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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pei Confucius Temple Confuci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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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1.옳바른 교육의 계승、total 1 picture

옳바른 교육의 계승

공자가 노국으로 돌아가게 된것은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었다. 진나라에서 관직을 맡아 일할 때부터 60을 넘은 공자는 항상 이렇게 감탄하며 말했다: “돌아가야겠다! 고향에 있는 젊은이들을 키워야 한다.”그리고는 북쪽을 향해 위나라를 방문했다. 노국과 위국은 인접하여,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또한, 공자의 몇몇 학생들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관직에 있으면서 뛰어난 실적을 보이고 있었고;덕업에 충실한 학생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예악과 학문이 깊어지면서 점차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공자는 자신이 노국을 떠날때 한참 어리던 학생들이 지금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 잘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에의 계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느끼었다. 과거에는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온마음을 다쏟았으나, 이제부터는 미래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노국으로 돌아온 후 공자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노년에 접어든 공자는 훌륭한 젊은이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그들의 심신을 단정시키고 옳바른 덕행을 지니게 하여, 혼란한 세상이 안정을 되찾도록 그들에게 ‘대도’를 전수하고 교육하였다. 공자 나이 15살에 배움에 대한 뜻을 두고, 배우고 성장하면서 자신이 익혔것을 세상에 내놓고,과거에 정치를 하면서 겪었던 갖갖 풍파와 그동안 보아왔던 여러나라의 불안한 정치들,수없이 격었던 인생의 고비, 이런저런 것들이 공자에게 있어 그의 일생을 통해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게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더욱 깊이있는 지혜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우러 찾아온 학생에게 그 지혜를 가르키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처세에 항상 반성하도록 가르켰다. 그런 가운데, 공자는 학생들을 가르키며 한편으로는 주나라 시대의 중요한 경전서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 모두 주나라 시대때 부터 내려온 정치적 학문으로, 공자도 이것들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학생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에 관한 문헌들이 주나라 초기때부터 전해 내려왔으나 정리하는 사람도 없어 난잡하고 많은 문서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배우려고 하면 반드시 질서정연하게 다시 정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공자는 이 문헌들을 분책하고 문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자가 이 문헌자료를 어느 정도로 개조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도 여러가지 추측과 토론이 있었지만 실제상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공자는 이러한 문헌에 대하여 단순히 분류하고 정리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상을 고대문헌속에 담아 정리하였기 때문에 훗낫 이것들이 중요한 경전으로 남게 되었고 공자가 후세의 학자들에게 전달하고저 하는 진귀한 지혜도 남게 되었다.

학생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공자가 위국, 노국에 돌아와 안착하자, 그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다. 공자는 새로 찾아온 학생들을 모두 마음을 다해 가르켰을 뿐아니라, 이미 공자곁을 떠나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에게도 매우 정성을 들여 그들을 지켜보았다. 공자가 제자와 대화를 한 내용을 보면 어떨 때는 성난 태도로 질책 하고 어떨 땐 즐거운 마음으로 칭찬하는 것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제자에게 두고 있었으며, 그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어버이같이 자식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들이 훌륭하게 자라나기를 절실하게 바랬던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자로서는 애통하기 그지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공자가 노국으로 돌아간지 4년째 되는 해, 공자의 제자중에 가장 덕행이 좋은 안회(顏回)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게 된다;그 이듬해 겨울, 원래 관직에 순조로히 있었던 중유(仲由)가 위국에서 그의 주인를 지키려다 피살되어 숨지게 된다. 이 두학생은 모두 공자를 오랫동안 따랐던 학생일 뿐아니라 공자와도 매우 두터운 감정을 나누고 있었던바, 각기의 수양과 덕행 그리고 정치군사면에서도 탁월하게 뛰어난 능력을 갖고있어, 장래가 촉망했던 학생들이었다. 공자는 슬픔과 애통을 금치못하였다. 중유가 살해된지 이듬해 4월,즉 기원전 479년의 여름, 공자는 73세 나이로 서거하게 되고, 제자들은 그를 노나라의 사수(泗水)강변에 묻었다.

공자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매우 애통해 하며 같이 모여 공자를 위해 상례를 치루었다. 그 당시는 상복에 있어, 스승과 제자로 나누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안회(顏回)와 중유(仲由)를 잃은 공자는 상복을 입지 않았어도, 자기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같은 예법으로 그들을 위해 상례를 지켰다. 그래서, 공자의 중요한 제자였던 단목사(端木賜)도 공자를 어버이와 같이 3년동안 수상을 지켰다. 또한, 예법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육신을 낳은 친아버지와 구분하도록, 상복은 입지 않고, 마음으로 수상을 지켰다.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남아 공자를 위해 3년간 심상 즉 마음의 상을 지켰다. 그리고는 스물 다섯 번째 달을 맞이하여, 상기가 끝나자 제자들은 아픈마음을 가다듬고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단목사(端木賜)는 여전히 홀로 남아, 다시3년간 홀로지낸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다른 제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곳을 찾아, 계속해서 공자의 가르침을 학습, 전수하고 그의 뜻을 펼쳐나갔다. 그리하여 공자의 사상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선진(先秦)시대에는 사회의 주류사상인 현학(顯學)으로 발전했다.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중국의 역사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국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학파들이 일어났으며, 제후들은 권력다툼으로 세상을 어지럽혔고 진나라시대에는 크나 큰 숙청이 일어났고, 한대 초기에는 동란을 거치며 역사가 변천했다. 한대의 역사학가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이 노나라의 유적지를 방문했을때, 공자를 모신 묘당에 그당시의 차와 의복 그리고 예기등이 고스란히 진열된것을 보았고, 유생들이 시간에 맞추어 공자가 살던 곳에 모여, 예악을 배우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해하며《사기(史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군왕과 우수한 인재들이 살다가며 명예를 누리었으나, 인생을 끝내면서 역사의 흔적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공자는 일개 평민으로 태어났으나, 대대로 기억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세상의 학자들에게 스승의 본보기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그를 지성(至聖)이라 일컬어 백번 마땅하다.”



Review by 梁台根教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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